은퇴는 끝이 아니라, 삶의 결을 다시 짜는 시작이었다. 5년 전 연구년을 이용해 다녀온 이탈리아 피렌체와 토스카나, 남부의 소도시들. 그곳에서 머물며 느꼈던 따뜻한 풍경과 여유로운 삶의 방식을 가슴에 담고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문을 두드렸다. 남편과 함께한 두 번째 ‘한 달 살기’에서 우리는 포르투의 골목과 리스본의 노란 트램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에게 집중한 시간, 그 안에 잊고 있던 삶이 있었다.

은퇴 이후, 다시 떠날 결심과 준비
2022년 여름으로 예정된 은퇴를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도 딱히 거창한 은퇴 계획을 손에 쥘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계획은 남편과 다시 한번 ‘한 달 살기’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5년 전 연구년을 이용해 다녀온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토스카나, 그리고 남부 소도시에서의 한 달 살기가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다. 은퇴 이듬해인 2023년 5월에 두 번째 ‘한 달 살기’를 추진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23일, 리스본에서 9일 머무는 일정이었다.
장기 체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소.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포르투의 현대식 아파트는 이용자들의 평가대로 훌륭했다. 깨끗하고 밝고 세련되었으며, 주요 관광지와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주택가에 위치해 조용했다. 그러나 리스본 숙소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한 차례 변경했고, 변경한 숙소는 여러모로 매우 불만스러웠다. 구시가지 알파마의 상 조르즈 성 안쪽에 있던 이 숙소는 택시의 접근성이 좋지 않아 도착하는 날부터 고생했고, 빌라의 시설과 여건도 좋지 않았다. 우리가 신시가지의 바이샤 지구에 구했다가 놓친 첫 숙소가 무척 아쉬웠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비교적 단기간 체류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숙소는 가능하면 일찍 알아보아야 선택의 폭이 넓고 좋은 곳을 구할 수 있으며, 특히 한국인이 작성한 평가를 참고하면 실패 확률이 낮다.
다음은 데이터 통신. 길을 찾느라 데이터를 많이 쓰는 남편은 유심칩을, 나는 로밍을 이용했다. 포르투갈의 대도시에는 가장 대중적인 보다폰 유심칩 매장이 여기저기 많으므로 국내보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것이 불량품 테스트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포르투, 조용한 아름다움 속으로
포르투는 유럽의 전통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면서, 아담하고, 여유로우며,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사람들이 친절하기까지 하다. 역사·문화적 의의가 큰 유적이나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꼭 가봐야 한다거나 공부해야 하는 부담 없이, 그리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되어 귀가할 필요 없이, 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구시가지 바로 앞에 아름다운 도루강이 흐르고, 조금 더 나가면 푸른 대서양과 고운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지며, 이곳저곳 숲이 우거진 공원과 정원이 많아 휴식처를 찾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포르투는 주변 도시를 탐방하기 위한 거점 도시로서도 훌륭했다. 남쪽으로 아베이루와 코스타 노바, 북쪽으로 브라가와 기마랑이스 등 주요 도시들을 완행열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방문할 수 있다. 남쪽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코임브라도 급행열차를 이용하면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모든 도시에서 명소가 밀집된 구시가지는 넓지 않으므로, 기차역에 도착한 후에는 대부분 걸어서 탐방할 수 있다.

구시가지 바로 앞에
아름다운 도루강이 흐르고,
조금 더 나가면 푸른 대서양과
고운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지며,
이곳저곳 숲이
우거진 공원과 정원이 많아
휴식처를 찾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작은 도시들, 크고 선명한 인상들
근교 도시들은 각각 특색이 있었다. ‘기도의 도시’라고 불리는 브라가의 봉 제주스 두 몬트 성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흰색 벽의 긴 계단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코스타 노바 석호를 마주하고 조성된 줄무늬 가옥 마을도 참으로 예쁘고 평화로웠다. 포르투갈 건국의 역사를 간직한 기마랑이스는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경으로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을 주는 아기자기한 도시이다. 페냐산자락 언덕에 자리 잡은 페냐 성소, 그리고 두 개의 첨탑이 솟아 있는 위로의 성모 성당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는 브라질 헤푸블리카 광장의 화단도 기마랑이스에 대한 호감을 높이는 데 한몫한다.
포르투 남쪽으로 완행열차 25분 거리에 있는 미라마르 마을의 해변과 백사장, 해변의 암석 위에 세워진 붉은 지붕의 아담한 예배당이 어우러진 풍광도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코임브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우선 장거리이므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급행열차를 이용해야 하고, 따라서 기차 요금이 많이 든다. 주요 관람지는 코임브라대학교인데, 관람지의 비싼 입장료에 비해 관람 인프라는 관람객 친화적이지 못했다. 큰 기대를 했던 코임브라의 하이라이트 조아니나 도서관 3층 ‘고귀한 홀’에서는 사진 찍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어 유감스러웠다.

리스본, 그 너머까지 이어진 풍경들
리스본은 포르투보다 훨씬 더 큰 대도시다. 당연히 관광객도 더 많고, 더 번잡하다. 전통적인 모습으로 일관된 포르투 구도시와 달리 리스본에는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 있는 알파마처럼 전통적 색채가 강한 지역과 넓은 광장 및 거리가 들어서 있는 바이샤처럼 현대적인 지역이 공존하고 있다.
리스본 역시 아름답다. 높은 언덕이 많아 어디서 보아도 붉은 지붕과 성당의 종탑, 그리고 테주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리스본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대항해 시대를 선도했던 나라답게 해양 대국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들도 볼 만하다.
리스본도 근교 도시를 방문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우리는 리스본 북쪽에 있는 파티마, 나자레, 오비두스, 서쪽의 신트라, 그리고 동쪽 알렌테주의 에보라와 몬사라스를 방문했다. 대중교통에 의존했던 우리는 시간이 촉박하여 신트라를 제외하고는 소그룹투어를 이용했지만, 개별 차량으로 이동한다면 모두 리스본에서 출발해 짧은 기간 내에 가볼 수 있는 근교 도시들이다. 성모 발현을 기념하는 파티마의 경건한 성소, 해안 절벽에서 내려다본 나자레의 아름다운 바다와 마을 풍경, 오비두스의 예쁜 성벽 마을, 끝없이 펼쳐지는 알렌테주의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코르크나무, 에보라의 특색 있는 성당과 로마 유적 모두 우리의 눈을 호강시켰다. 특히 사랑스럽고 예스러운 마을 몬사라스에 들러 대형 와이너리의 와인 숍 테라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시음했던 시간은 참으로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마법의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저택과 고풍스러운 건축물, 녹음이 우거진 숲과 정원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는 신트라의 헤갈레이라 별장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타일과 문양, 금빛으로 수놓인 도시
아줄레주, 칼사다 포르투게사, 탈랴 도라다는 포르투갈 문화예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방문한 모든 도시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장식 타일 아줄레주를 쉽게 만났다. 성당이나 궁전과 같은 특별한 건물뿐만 아니라 식당이나 기차역, 골목길의 담벼락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아줄레주를 볼 수 있었다. 특히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푸른색 아줄레주는 그 독특한 신선함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스본의 아줄레주 국립 박물관에는 15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아줄레주 작품이 연대기별로 전시되어 있어 아줄레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방문하기를 권한다.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광장이나 보도에 들어서면 바닥도 예술 작품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은 돌조각으로 규칙적인 무늬를 넣어 모자이크 형태로 포장한 칼사다 포르투게사 때문이다. 물결이 너울대는 모양을 비롯해 독특한 무늬로 포장한 광장과 길의 바닥도 포르투갈의 훌륭한 문화적 자산이다. 또한 나무 조각물에 금박을 입힌 탈랴 도라다는 포르투갈 성당 장식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많은 성당이 탈랴 도라다로 장식되어 있지만, 특히 포르투의 산타클라라 성당은 그 아담한 공간 전체가 온통 반짝이는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고 금박의 반짝임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 눈부시게 화려하다.



포르투의 산타클라라 성당은
그 아담한 공간 전체가
온통 반짝이는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고 금박의 반짝임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
눈부시게 화려하다.
여행이 일상이 된 시간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물가가 가장 낮은 도시에 속한다. 특히 시장 물가는 상당히 낮다. 즉, 집에서 음식을 해 먹으면 생활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들어 포르투갈에서도 물가가 많이 올랐다. 무엇보다 외식 물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단, 커피와 와인 가격은 아직도 저렴하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 식사는 대체로 집에서 해 먹고, 점심 식사는 밖에서 포르투갈 토속 음식을 주로 사 먹었다. 포르투에서는 시내 골목길에서 우연히 가성비 좋은 식당 한 곳을 발굴하여, 그 단골 식당 메뉴를 거의 다 먹어볼 정도로 애용했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음식은 우리 입맛에 맞았다. 대구, 문어, 정어리, 아귀, 돼지고기, 송아지고기, 닭고기, 해산물 등 각종 식재료를 사용한 포르투갈 토속 요리는 많이 짰던 일부 음식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맛이 좋았다. 특히 대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 여러 가지 요리를 먹어보았는데, 모두 맛이 괜찮았다. 해물 밥과 해물 스튜 등 해물 요리도 훌륭했다. 이 모든 음식은 와인과 함께 먹어야 제맛이 난다. 우리는 포르투갈 음식을 먹을 때는 거의 빠짐없이 와인을 마셨다. 서울에서는 레드와인을 마시곤 했는데, 포르투갈에서 주로 생선이나 해물 요리를 먹다 보니 화이트와인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포르투갈 커피는 값도 저렴할 뿐만 아니라 맛도 좋다. 진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맛이다. 거의 매일 커피를 사 마셨는데,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가격과 관계없이 어디서 먹든 맛이 좋았다. 이곳에서는 메뉴판에 아메리카노를 ‘에스프레소 더블’로 표기해 놓은 곳이 꽤 많다. 즉 이러한 카페나 식당에서 아메리카노는 양이 두 배인 에스프레소의 개념이고, 따라서 매우 진하고, 가격도 에스프레소보다 비싸다.
길거리에서 영어는 잘 통하지 않는다. 리스본보다 포르투에서 더 그렇다. 그래도 제스처, 눈치, 구글 번역기에 의존하여 한두 번을 빼놓고는 의사소통에 실패한 적이 없으니, 언어 때문에 개별 여행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또 큰 식당이나 상점에서는 적어도 직원 한 명은 손님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5년 만의 장기 해외여행이라 떠나기 전에는 과연 건강과 체력이 뒷받침해 줄 수 있을지 상당히 염려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서 떠나기 전의 걱정은 기우였고, 우리 부부는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차고, 새로운 삶에 도전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포르투 마토지뉴스 해변의 고운 백사장과 바다로부터 불어오던 청량한 바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쏟아지던 따가운 햇살, 이 황홀한 자연을 마주하고 테라스 카페에서 마시던 진한 커피가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