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VOL.203

편하게 보기
우리는 지금 | write.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영어 트라우마를 떠나,
두 번째 인생을 말하다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인생 2막에 배우는 영어

어학연수. 어딘가 젊은 세대들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선입견일 뿐, 여기 중년의 나이에 어학연수에 도전한 이들이 있다. JTBC 예능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에서는 평균 나이 52.8세의 중년 배우들이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시작했지만 이 도전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포스터

영어가 트라우마인
중년 배우들의 도전

“중학교 영어 선생님한테 맞고 나서 손을 놨어요. 영어만 보면 머리가 아파. 그 때 생각이 나고 그래서 사실 나도 한번 어학연수란 걸 갈 수 있을까? 내 생애에? 그랬는데 사실 뭐 좀 두렵기도 한데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기대가 있어요.” JTBC 예능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에서 영국 어학연수를 떠나게 된 김광규는 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그에게 영어는 트라우마다. 아픈 기억 때문에 공부를 놓게 됐지만, 요즘처럼 해외를 가는 일이 일상이 되고 그래서 영어를 모르면 곤란해진 현실이 그에게는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실제로 그는 공항 검색대에서 “총기 가지고 있냐”고 묻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예”라고 말했다가 구석으로 끌려가 검사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어디 김광규만의 일일까. 누구나 한번쯤 해외여행 입국 심사대 앞에서 잔뜩 긴장했던 경험은 있을 테니 말이다.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는 김광규처럼 저마다의 이유로 영어 연수를 함께 떠나게 된 다섯 명의 중년 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익숙하게 영어로 듣고 말하는 아이들과 달리 영어 앞에서 얼어붙는 성동일은 소통을 원하고, 외국 뮤지컬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 통역 없이 알아듣는 후배들이 부럽다는 엄기준은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어하며, 해외 활동이 많아지고 있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곤 있지만 느는 것 같지 않다는 장혁과 신승환은 그 좌절감을 극복하고 싶어한다.

사실 중년 세대에게 영어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회한이 남는 공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오래 영어 공부를 한 것 같지만 막상 외국인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혀버리는 게 중년 세대들이 해왔던 영어 공부였으니 말이다. 요즘처럼 원어민 선생님과 대화를 해가며 배우는 ‘생활영어’와는 너무나 달랐던 ‘입시 영어’가 만들어낸 부작용이다. 그래서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는 중장년 세대들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영어에 대한 회한의 정서를 툭툭 건드리며 도전 욕구와 궁금증을 깨워낸다. 과연 이 중년 배우들이 2주간 영국에서 겪게 되는 어학연수는 이들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1화

낯선 두려움이
설렘으로 바뀌는 과정

그런데 이들의 어려움은 본격 어학연수에 들어가기도 전, 어학원을 찾아가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려 지하철과 열차를 타고 목적지인 영국의 교육도시 케임브리지까지 가야 하는 여정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안내 데스크에 안되는 영어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고, 복잡한 지하철 노선 때문에 갔던 길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40분이면 가는 거리를 2시간 40분을 헤맨 끝에 겨우 케임브리지로 가는 기차를 탔다. 이들은 언어의 장벽이 얼마나 높은가를 실감한다. 낯선 곳의 두려움과 힘겨움이 언어 소통의 문제와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가를 이들이 케임브리지에 마련한 숙소까지 가는 지난한 여정이 담아낸다.

첫 등교 전 숙소에서 보내는 일요일도 언어의 장벽이 만들어내는 두려움들이 일상에서 묻어난다. 장을 보기 위해 시내에 나가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일부터 집에서 바비큐를 하기 위해 이웃집에 토치를 빌리러 가는 일까지 언어소통의 부담감이 채워진다. 그러니 어학원에 첫 등교하는 발길이 무겁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반을 나누기 위한 레벨테스트의 두려움을 넘어 반이 정해지고 환대하고 배려해주는 선생님, 같은 반 새 친구들과 조금씩 친해져가면서 이들의 낯선 두려움은 설렘으로 바뀌어간다. 여전히 영어는 늘지 않지만 그래도 함께 놀이하듯 공부하고 또 펍에서 술을 마시며 친해지면서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만드는 두려움은 사라져간다. 영어를 잘 하면 좋겠지만, 능숙하지 못하다고 해도 배려해주는 마음이 있어 일상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이들은 깨달아간다. “실수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실수를 해야 배울 수 있는 거예요. 실수를 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어요.” 초급반을 맡은 제이드 선생님의 말에 김광규도 성동일도 용기를 얻게 된다.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1화

어학연수,
영어 공부 그 이상의 경험

젊은 세대들에게 어학연수는 그리 낯선 경험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성동일 같은 중년 세대는 다르다. 자식들은 어학연수를 보냈어도 본인은 생계를 위해 자신을 위한 어학연수 같은 선택과 도전은 좀체 해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공부를 한다는 것도 새롭지만, 외국에서 일정 기간을 살아본다는 건 어디서도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학연수는 비즈니스를 위한 해외 출장과도 다르고, 가족들과 간간히 갔던 단 며칠 간의 여행과도 다르다. 한 곳에 체류해 그 곳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삶 속 깊숙이 들어가보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학연수를 통해 배운 실전 언어는 그 경험을 더 가능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 5인의 중년 배우들이 머무는 집에서 이웃집 부부를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하는 일은 여행으로서는 얻기가 쉽지 않은 경험이다. 그 곳에서 일정 기간을 살아야 가능해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학연수에도 여행이 빠질 수는 없다. 마침 연휴 기간을 맞이한 5인의 중년 배우들이 저마다 영국을 생각하며 꿈꿨던 로망들을 경험하러 나서는 일이 그것이다. 뮤지컬 배우로서도 활약하고 있는 엄기준은 장혁과 함께 브로드웨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감상하고, 손흥민의 팬이라는 김광규와 신승환은 손흥민이 출전해 시즌 1·2호 골을 연달아 넣어 4:0 대승을 거둔 토트넘 경기를 직관한다. 성동일은 버킷리스트였다는 대영박물관을 돌아보며 람세스상과 비너스상 앞에서 감격하고 길거리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지나는 런던 사람들을 구경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또 런던의 야경을 구경하고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빅벤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빅벤 앞에서 아이처럼 좋아하며 사진을 찍는 성동일을 보여주며 프로그램은 질문한다.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라고.

물론 어학연수의 목적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지만, 그 언어는 그들의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곳의 일상을 경험하는 것 또한 공부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통해 하는 여행은 그 감흥도 체험의 목적도 다르게 느껴진다. 식당에서 음식 하나를 주문하는 일도,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일도, 뮤지컬을 보거나 박물관을 관람하는 일도 언어와 문화를 체험하고 습득하는 일이 된다.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5화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5화

어학연수라 쓰고
소통의 즐거움이라 읽는다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린 2주. 졸업식에서 김광규는 졸업 연설을 한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합니다. 나는 영어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래서 제 별명은 ‘트라우마’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고맙습니다. 나는 여기서 열정을 갖게 됐어요. 친구들, 사라, 산티아고, 이사벨라, 라인 그리고 제이드 선생님, 당신은 항상 나를 행복하게 했어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이드. 감사합니다.” 너무나 간단한 문장들이고, 문법도 조금씩 틀린 영어로 적혀진 연설문이며 그걸 읽는 발음 또한 영 시원찮지만 거기 담긴 김광규의 진심이 읽혀진다.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따뜻해진다.

과연 언어란 무엇을 위해 배우는 것일까. 쉬운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낯설고 두렵고 힘들어 말조차 하지 못하는 김광규가, 케임브리지 현지인들과 함께하는 포틀럭 파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환대받는 광경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중장년 세대에게 영어란 좋은 점수를 받아 대학에 가거나 유학을 가고 성공을 하기 위한 언어였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승진을 위해 잠을 쪼개가며 새벽반 영어학원을 다니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의 방편으로서의 언어는, 본래 소통의 즐거움이어야 할 언어를 괴로운 어떤 것으로 바꿔놓았다. 문법에 맞고 능숙하게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라, 조금 틀리고 어색해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것이 타국의 언어를 배우는 일일 수 있다는 걸 김광규를 비롯한 5인의 중년 배우들이 보여준다.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가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은 과연 배움에 늦음이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 출연한 중년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52.8세다. 과거라면 노년의 나이로 분류되었겠지만 평균 연령이 80세 이상이 된 현재 이 나이는 이제 중년이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 이모작을 준비할 이 시기에 어학연수라는 새로운 도전은 그 의미가 크다. 요즘처럼 글로벌 시대를 맞이해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만큼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다. 언어를 배우면 해외여행을 보다 즐겁게 할 수 있고 나아가 보다 깊이 있게 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언어에 익숙해지면 해외의 정보들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할 수 있는 기회들도 많아진다. 만일 하루하루 가족을 위해 생업에만 바쁘게 살아왔다면, 단 몇 주라도 그 생업을 떠나서 조금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경험과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테니.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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