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내내 부부가 함께 떠나는 여행은 늘 짧고 아쉬웠다. 어느 날, 남편은 은퇴했고 나는 연구년을 맞았다. 마침내 길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기가 찾아왔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꿈꿔온 ‘피렌체 한 달 살기’를 실행에 옮겼고, 토스카나의 중세 소도시들과 아말피 해안, 남부의 마테라까지 천천히 걸으며 여행을 넘어 더 풍성한 삶의 감각을 배웠다. 은퇴를 앞두고 이탈리아에서 한 달 동안 살아본 시간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에게 건네는 조용한 예행연습이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두오모)
피렌체에서 시작하는
은퇴 예행연습
우리 부부는 해외 근무나 연구년으로 해외 생활을 꽤 많이 했지만, 부부 함께가 아니라 각자 홀로 지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같이 여유롭게 여행하며 우아한 식당이나 카페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곤 했다.
마침내 2018년 가을 남편이 은퇴하고, 내가 연구년을 맞이하면서 비로소 장기간의 부부 동반 여행이 가능해졌다. 그때 내가 은퇴를 4년 남겨둔 시점이었기에, 일종의 ‘은퇴 예행연습’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이전부터 동경해 왔던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한 달 살기’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처음 3주는 피렌체에 머물며 문화유적과 예술 작품들을 여유롭게 돌아보고, 중간중간 토스카나의 중세 소도시들과 인근의 아름답고 역사적인 도시들을 당일 여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 1주는 ‘죽기 전에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 1순위라는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 해안과 남동부 여행의 거점인 바리 주변의 소도시에 할애하기로 했다.
피렌체에 머물며 문화유적과
예술 작품들을 여유롭게 돌아보고,
중간중간 토스카나의
중세 소도시들 인근의
아름답고 역사적인 도시들을
당일 여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길지도 짧지도 않고 완벽했던
피렌체와 토스카나 3주
피렌체 중심가에 이탈리아 전통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성비 좋은 빌라를 에어비앤비를 통해 빌렸다. 지역 간 이동은 기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고, 블로그를 통해 운행 시간 정보를 얻었다. 장거리 기차표도 사전에 예약하며 여행 준비를 마쳤다.
피렌체와 토스카나 3주 일정은 길지도 짧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피렌체의 문화유적 탐방과 토스카나 소도시 탐방을 번갈아 가며 하는 일정도 기분 전환에 효과적이면서 피로감을 적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좋았다.
계절도 괜찮았다. 이탈리아 여행에는 5월이나 10월이 춥지도 덥지도 않아 최적기이지만, 11월도 차선으로 좋은 시기다. 우리나라 10월과 기온이 비슷하고 관광 비수기라 피렌체 중심지를 제외하면 인파가 많지 않아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성수기에 비해 숙박비를 비롯하여 물가가 싼 것도 큰 장점이다.
다만, 11월은 우기이다. 다행히 비로 인해 여행에 지장을 받았던 곳은 마지막 여행지 한 군데였다. 또 비수기여서 소도시에서는 문을 닫은 식당이나 상점이 많아 다소 썰렁하게 느껴지는 것도 단점이라 하겠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오페라 박물관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피렌체
피렌체는 그동안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천재 예술가들의 수많은 걸작이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곳이다. 피렌체에는 랜드마크인 두오모(대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을 비롯하여 문화·예술적, 역사적 의의를 지닌 성당이 즐비하다. 성당 내부에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이 넘쳐난다.
두오모 성당은 흰색·초록색·분홍색 대리석과 수많은 조각상으로 화려하게 외벽을 장식하고, 붉은 벽돌의 거대한 돔을 얹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당이다. 피렌체에서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명소다. 산 마르코 수도원도 인상적이다. 사제들이 기거했던 40여 개의 독방 - 기도실이자 침실이었던 이 독방은 침상과 책상, 작은 창문 하나만 있어 마치 감옥 같은 느낌을 준다. 신에게 자신을 바쳤던 수도사의 고행 흔적이 역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방의 벽에 한 점씩 그려져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담백하면서 온화한 프레스코 성화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평안을 안겨준다. 고행하던 수도사의 영혼에도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보티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과 <봄의 향연>을 관람할 수 있는 우피치 미술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볼 수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모두 회화와 조각의 보고이다. 또 두오모 성당과 세례당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 작품은 대부분 복제품으로, 진품이 모여 있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오페라 박물관도 빠트릴 수 없는 곳이다.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독방의 벽에 한 점씩 그려져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담백하면서
온화한 프레스코 성화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평안을 안겨준다.
고행하던 수도사의 영혼에도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몽환적인 토스카나와
성자의 도시 아시시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찾아갔던 토스카나 구릉의 늦가을 풍광과 중세 소도시의 정갈하고 단아한 모습은 피렌체에서 문화예술품을 관람하느라 쌓인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모든 도시가 규모가 크지 않고, 피렌체에서 기차와 버스로 두세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당일로 다녀오는 일정은 효율적이었다.
시에나는 ‘도시 전체가 고딕 유산으로 가득 찬 대형 박물관’이다. 황토색의 아홉 쪽 부채꼴 모양으로 나누어져 있는 캄포 광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만지아의 탑, 푸블리코 궁전의 시립 박물관, 산타 마리아 아순타 대성당 등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성인 프란체스코의 탄생지이자 활동 무대였던 아시시는 아치형 돌담 성문, 웅장한 성채, 성당의 종탑과 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격조가 있었다. 특히 성 프란체스코 성당과 포르치운콜라 경당은 깊은 감동을 남겼다.
아시시나 시에나 같이 관람해야 할 명소가 많은 곳도 있었지만, 산지미냐노나 발도르차 평원의 소도시에서는 명소들을 봐야 한다는 부담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골목골목 돌아다니다가 양지바른 광장의 테라스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식사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구릉과 호리호리한 사이프러스, 황금색으로 물든 포도밭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올리브 나무들이 빚어내는 토스카나의 풍경은 실로 몽환적이었다.
알록달록한 집들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아말피
아말피 해안,
자연이 주는 진정한 휴식
역사와 문화예술의 도시 피렌체와 토스카나를 뒤로 하고 찾아간 아말피 해안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자연이 보장해 주는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굴곡이 심한 해안도로를 롤러코스터 타듯 달리면서 절벽에 매달려 있는 알록달록한 집들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을 감상하는 맛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순간을 어떻게 간직할까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그런 풍경이 이어졌다.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라벨로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늦가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숲과 산책로, 지중해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연의 테라스, 곳곳에 놓여 있는 조각상, 고색창연한 회랑을 갖춘 빌라 침브로네 정원은 무척 기품이 있었다. 해 질 무렵 세련된 포지타노의 황금빛 풍경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고색창연한 회랑을 갖춘 빌라 침브로네 정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테라의 사시 지구
7천 년 인류의 흔적, 마테라
이탈리아 남동부 여행의 거점 도시인 바리에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마테라는 선사시대부터 7천 년간 인류 활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던 고도(古都)다. 피렌체나 토스카나의 중세 소도시들보다 더 오랫동안 시간이 멈춰 선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석회암 협곡에 동굴을 파고 살아왔던 사시 주민들의 오랜 고난의 흔적과, 불행했던 과거를 소재로 새로운 관광지로 도약하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마테라는 접근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사시의 전망을 보는 순간 이런 불편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빠질 수 없는 즐거움, 먹거리
피렌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피렌체식 티본스테이크 ‘비스테까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이다. 식당마다 고기의 두께와 굽기 정도가 다르므로, 취향에 맞는 식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 안내책에 소개된 식당에서 처음 먹어본 전형적인 피렌체식 스테이크는 상당히 두툼하고 덜 익힌 상태였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여기저기 발라먹고 나니 마치 사자가 끝낸 식사 같았다. 다음번엔 숙소 주인의 추천을 받아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식당을 찾아갔는데, 스테이크의 두께가 훨씬 얇고 굽기 정도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피렌체를 떠날 때까지 이 식당을 몇 차례 더 이용했다.
토스카나는 와인 산지로 유명해 반드시 와인을 맛보아야 한다. 발도르차 평원을 끼고 있는 와인 산지 몬탈치노, 피엔차, 몬테풀치아노는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려워 우리는 이 세 곳을 하루에 둘러보는 현지 와인 투어 상품을 이용하여 다녀왔다. 와인도 맛보고 아름다운 소도시도 구경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피렌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피렌체식
티본스테이크
‘비스테까 알라 피오렌티나
(Bistecca alla Fiorentina)’이다.
식당마다 고기의 두께와
굽기 정도가 다르므로,
취향에 맞는 식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여행은 남편이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행의 기획은 내가, 집행은 남편이 한 셈이다. 현지에서 길을 찾고, 짐을 옮기고, 교통편을 확인하는 것은 남편의 몫이었다. 식당을 선택하고, 계획했던 식당이 문을 닫았거나 여의치 않았을 때는 대안을 찾아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방향을 맞추어 우산을 받쳐 주기도 했다. 진정으로 여행의 동반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피렌체 시내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