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는 앞서가는 것들을 벤치마킹해 새로운 것을 내놓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였다. 그러나 이제 K컬처는 뒤따라가는 것이 아닌,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패스트 무버(Fast mover)’로 등장하고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미국이 만든 K팝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오징어 게임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영화와 쇼 부문을 모두 포함해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본 콘텐츠 1위에 올랐다. K팝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가 악령을 물리치고 노래로 세상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로, K팝 아이돌과 무속 신앙이라는 한국적인 요소를 흥미롭게 담아냈다. K팝을 소재로 한 작품인만큼, OST로 수록된 8곡이 일제히 빌보드 차트에 진입했고, 대표곡 ‘골든(Golden)’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랐다. 실제 K팝 아이돌도 이루기 어려운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이다.
게다가 영화 속 곳곳에 등장하는 무속과 저승사자, 도깨비, 민화 속 까치, 호랑이 같은 한국의 전통문화 요소는 물론, 배경으로 등장한 남산 타워, 서울의 길거리 풍경과 목욕탕, 컵라면, 김밥 같은 한식 등 한국 문화 전반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찍이 호작도(까치, 호랑이)를 소재로 굿즈를 만들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때아닌 오픈런 특수를 겪고, 남산 타워 주변의 성곽길, 북촌 한옥마을 같은 곳으로 외국인들이 ‘성지순례’하듯 찾고 있다. 이른바 신드롬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작품은 소니 픽처스에서 제작한 미국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굳이 K팝을 소재로 삼고, 한국의 무당에서 모티브를 얻은 서사와 디테일한 생활 문화를 담은 건 우연이 아니다. 이제 K팝은 서브컬처가 아니라 빌보드 차트가 익숙해질 만큼 메인컬처로 등극했고, K드라마와 K무비를 통해 친숙해진 한국문화는 세계에서 힙한 문화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이었기에 이런 기획이 제안될 수 있었겠지만, 그걸 수용한 건 소니 픽처스와 넷플릭스다. 제작사와 배급사가 K팝과 K컬처에 대한 글로벌 열풍을 공감하지 않았다면 이뤄질 수 없었던 프로젝트다.
그래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만들어내고 있는 신드롬급 성공을 보다보면, K컬처가 이제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미국의 가장 트렌디한 팝을 빠르게 수용해 우리 식으로 해석해내려 했던 K팝은 이제 나아가 우리만의 아이돌 시스템이나 협업 방식을 해외에서 따라할 정도로 주도권이 생겼다. 과거에는 앞서가는 것들을 벤치마킹해 빠르게 따라가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이었다면, 이제는 글로벌 시장을 이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도권을 갖는 패스트 무버의 전략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팬덤문화, K팝스타일, 예능 포맷,
이제 저들이 따라온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도 시작부터 등장하듯이 K팝에는 독특한 팬덤 문화가 있다. 팬들이 SNS를 기반으로 아이돌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댄스 커버 영상, 팬픽션 등을 공유하며 굿즈 공동 구매를 조직하기도 한다. 팬덤 활동은 아이돌에 대한 응원과 지지에서 멈추지 않고 구호활동이나 사회를 위한 기금 모음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러한 K팝 팬덤문화는 음악을 넘어선 아티스트와의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SNS를 통해 해외에서도 익숙한 팬덤문화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K팝의 영향력은 아시아권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확장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걸그룹 스타비(StarBe)는 2023년 K팝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패션, 안무, 카메라 워크 등 다양한 요소들을 배우고, K팝을 인도네시아풍으로 재해석해 전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아이돌 프로듀서>와 <프로듀스101 차이나>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돌 그룹이 탄생했는데, 이는 한국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방식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다. 이처럼 해외가 한국의 콘텐츠 포맷을 리메이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의 글로벌 버전
K컬처의 자신감,
이제 글로벌 협업을 향해 간다
더 나은 무언가를 빠르게 따라잡아야 한다는 목표는 바뀌기 시작했다. 분명한 경쟁력을 갖춘 우리의 K컬처를 들고, 전 세계와 협업하는 자신감 있는 행보가 본격화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연예 기획사 하이브가 미국의 게펜레코드, 영국의 폴리도르 레코드, 일본의 유니버설 인터내셔널 같은 다국적 회사들과 협업해 탄생시킨 미국 현지화 다국적 걸그룹 캣츠아이가 그렇다. 한국인 1명과 다국적 멤버 5명으로 이뤄진 이 걸그룹은 하이브가 가진 K팝 시스템을 통해 단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팬덤을 구축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한국은 웹툰, 게임,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글로벌 협업을 주도하며 글로벌 문화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세계의 트렌드를 따라잡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온 K컬처는 전세계 문화 지형의 일원으로서 원조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무언가를 따라가기보다는 주도하는 입장으로서, 원조만이 내놓을 수 있는 분명한 색깔들을 드러낼 때가 됐다.